논리학LOGIC이란 무엇인가?

Logic에 대한 잡설

1985년 경북대학교에 들어갔다. 학력고사를 치른 뒤 결과가 나온 다음 내 성적으로 갈 수 있는 대학교를 찾아 봤다. 내가 살던 왜관을 굳이 떠나지 않고도 다닐 수 있는 4년제 대학교는 경북대학교, 영남대학교, 계명대학교가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내 성적이면 경북대학교를 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비록 서울에 있는 학교는 아니었지만 당시 경북대학교는 지방대 중에선 원탑이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경대 영어영문학과에 지원했다.

고백할 게 있다. 난 사실 전공을 주먹구구식으로 선택했다. 좀더 솔직히 말한다면 당시 난 뭘 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대학 들어가는 게 중요했지 막상 뭘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고민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냥 영어를 잘 했으니까 영문과를 가라고 주변에서 조언했고 난 그걸 그냥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게 얼마나 내 인생을 망칠지도 모르고.

떨어질 거라는 생각은 안 했지만 막상 발표날이 다가오면서 조금 긴장이 되기는 했다. 합격자 발표를 보기 위해 경북대학교를 걷던 날이 생각나다. 아마 북문으로 들어갔던가 싶다. 날씨가 추웠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조금이라도 빨리 확인하기 위해 종종 걸음으로 걸어갔던 기억만이 남아 있다.

혹 떨어졌으면 어쩌지? 재수를 해야 하나? 하기 싫은데. 그럼 달리 뭘 하지? 이런 뒤숭숭한 마음을 가진 채 걷다보니 어느새 학교 본관 건물에 도착했다. 주변에는 결과를 보기 위해 온 많은 학생과 부모들이 있었다. 나는 얼른 게시판을 보기 위해 벽으로 다가갔고 영문과 합격자 명단을 확인했다. 이름들 가운데 내 이름이 보였다. 순간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 난 그렇게 경북대학교에 들어왔다.

대학교 들어가고나서 교양 과목으로 배웠던 논리학. 매우 흥미로웠지만 당시엔 내가 그 과목을 제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논리적인 주장을 비논리적인 주장으로부터 구분하는 과목이었는데 난 그 당시 논리학을 그냥 말을 잘 할 수 있게 해주는 학문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추론 규칙이니 논증이니 하는 것들이 따분하고 생경하게만 보였다. 그저 오류에 대한 부분만 흥미를 불러일으켰을 뿐이었다.

도표와 수식은 그래서 더욱 나를 그 과목에서 멀어지게 만들 뿐이었고 중간고사를 본 이후 나의 멘탈은 완전히 나가버렸다. 철학을 공부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학문이라는데 난 도무지 논리학과 친해지지 않았다. 그때 C학점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나마 낙제는 면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졸업한지 수십 년이 흘렀지만 철학에 대한 나의 관심과 애정은 여전하다. 그 기본 도구로서의 논리학에 대한 흥미도 전혀 식지 않았다. 대학 당시의 얼치기 사고가 아니라 수십 년을 묵힌 생각의 근육을 단련시켜 온 결실을 이제야 보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먼저 고백하자면 나는 머리가 좋지 않다. 그래서 배움도 느리고 깨달음은 더더욱 느리다. 그래도 지치지 않고 끈질긴 장점도 있다. 그래서 나의 블로그에서 내가 좋아하는 논리학을 안내하고 함께 공부할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내가 참고하는 교재는 어비 카피의 논리학 입문.

참고로 논리학에 대한 개괄적인 안내는 https://en.wikipedia.org/wiki/Logic를 참고하시라.

 

 

들어가는 말

이성은 우리가 기댈 수 있는 판단에 도달할 우리의 목적이 있는 어느 곳에서건 우리 인간들이 반드시 의지해야 할 도구이다. 습관은 많은 경우 효율적인 지침이다. 반면 충동은 종종 호소력은 있지만 어떤 때는 저항할 수 없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과 모든 다른 비이성적인 판단 근거는 우리의 행복이 서실이 무엇인지 그리고 알려진 사실에서 무엇이 정확하게 추론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에 달려있다고 할 때 재앙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모든 걸 우리 스스로 다 이성적으로 밝혀낼 수는 없다. 권위에 으지하는 것이 종종 필수적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완벽하게 습득할 시간이 없었던 것을 연구하고 익히는 사람들의 안내에 의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는 어떤 귄위있는 것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고 왜 존경할만 한지 를 반드시 결정해야 한다. 이런 판단들 또한 이성을 사용할 것을 요청한다. 모든 진지하게 지성적인 추구를 함에 있어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이성에 의지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걸 성공적으로 대신할 어떤 다른 도구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논리학을 공부하면 우리의 추론하는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고 그것들이 더욱 의지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 논리학에서 우리는 우리는 판단을 어떻게 방어하고 우리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주장들에 대한 방어를 비판하는 것을 배운다. 논리학을 사용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서사 능력을 강화하고 우리의 지적 능력을 성숙하고 결실있게 한다. 우리는 논리학을 공부하면서 좋은 논증을 나쁜 논증과 구분하는 것을 배운다.

“논리학”이란 말은 우리 모두에게 친숙하다. 우리는 “논리적인 행동”, “논리적인 마음” 등등에 대해 말한다. 이것들은 흔히 잘못됐거나 이성적으로 방어할 수 없는 “비논리적:인 것과 대비된다. 논리학을 공부하면 바른 추론의 원칙들을 드러내고 설명하고 그것들의 효과적인 사용을 보여줌으로써 잘 추론하도록 도와준다.

바른 추론의 원칙들은 지식의 모든 분야에 적용될 수 있다. 대학교 강좌들은 종종 일상 생활에는 부적절한 너무나도 “학제적인” 것으로 비판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비난이 정당하게 논리학을 공부하는 것에 적용될 수는 없다. 과학에서건 정치에서건, 진중한 도덕적 선택을 함에 있어서건 모든 일상에서의 당황스런 상황에 대한 대안이 되는 방안을 숙고하는 경우에서이건 우리는 우리의 결론을 방어하기 위해 논리학을 사용한다. 어떤 경우에서든 우리는 훌륭한 논증을 필요로 한다. 논리학을 공부하면 좋은 논증과 그것들이 좋은 이유를 확인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것은 또한 나쁜 논증과 그것이 나쁜 이유를 확인하는 데 도움을 준다.

민주주의 이념은 이제 거의 모든 곳에서 공개적이고 자유롭게 선언되어 있다. 이들 이념을 실현하는 것은 시민들의 일상에서 효과적으로 참여할 그들의 능력과 의지를 가정한다. 효과적으로 참여한다는 건 우리가 뽑은 지도자들이 제공하는 혹은 우리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 제공하는 무수히 많은 주장들을 평가하도록 만든다. 종국적으로 민주주의의 성공은 우리 시민들이 하는 판단의 신뢰성과 그리하여 주장과 증거를 이성적으로 거를 수 있는 능력과 결정에 달려 있다. 따라서 논리학은 개인적 목표를 진전시키는 것 뿐 아니라 우리 공동체 속에서 타인과 우리가 공유하는 목표를 실현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 명확하고 정확한 사고의 규칙을 배우는 것보다 공식적인 연구에서 더 유용한 것을 배울 수는 없다. 새로운 정보를 어떻게 습득하고 처리하며 상충하는 주장들을 어떻게 추론하고 판단하는 것 말이다. 이상적으로 보자면 모든 학문의 강좌가 이 목적에 기여를 하지만 우리는 많은 것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이 최고로 중요한 일에 촛점을 맞추는 것은 단호하게 논리학의 영역 속에 있다.

대학에서 배우는 많는 것들은 곧 구식이 되어버리지만 바른 추론은 결코 낡은 것이 되지 않는다. 논리학의 규칙은 이 규칙들을 숙달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관심을 들인 모든 사람들의 지적인 삶에 영속적이고도 깊이 만족시키는 기여를 할 수 있다.

 

추론REASONING

1.1 논리학LOGIC이란 무엇인가?

논리학LOGIC이란 옳은 추론을 옳지 않은 추론으로부터 구별하는 데 사용되는 방법과 규칙이다. 옳은 추론이 정의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이 있다. 이들 기준을 알지 못 하면 그것들을 쓸 수 없다. 논리학을 연구하는 목적은 훌륭한 논증을 시험하고 훌륭한 논증을 나쁜 논증으로부터 구별하는데 사용될 수 있는 기준들을 발견하고 쓸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모든 소재에 대한 추론은 논리학자의 관심사이다. 과학, 의학, 윤리학과 법, 정치와 광고 스포츠와 게임, 심지어 단순한 일상사의 문제 등에서의 추론이 그러하다. 매우 다른 종류의 추론이 사용될 수 있고 모든 것은 논리학자의 관심사이다. 우리에게 쭈욱 관통하는 관심사는 그런 논증들의 소재가 아니라 그것들의 형식과 질이다. 우리 목표는 논증을 시험하고 평가할 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좋은 추론이란 탐구에서 가장 의지할 수 있는 도구이다.

논리학자들이 주된 관심을 갖는 것은 추론 과정이 아니라 그 결과이다. 즉, 추론이 산출할 수도 있는 완성된 논증이다. 일부 사람들이 한 것처럼 논리학을 “추론의 과학”으로 정의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어떠한 그런 과학도 추론이 도출되는 사고 과정에 주로 관심을 기울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논리학자보다는 심리학자의 영역일 경우가 더 많다. 논리학이 “사고 법칙의 과학”도 아니다. 왜냐하면 추론은 그런 것의 중 단지 하나일 뿐인 많은 종류의 사고가 있기 때문이다. 논리학자가 아닌 많은 사람들은 사고를 탐구의 대상으로 촛점을 맞출지도 모른다.

추론의 산물인 논증에 관심을 기울임에 있어 논리학자들은 다음 사항을 질문한다. 도달한 결론이 사용된 혹은 가정된 전제들로부터 따라나오는가? 전제들은 도출된 결론을 받아일 훌륭한 이유를 제공하는가? 만약 전제들이 정말로 결론을 받아들일 적절한 근거를 제공하고 전제가 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결론 역시 참임을 보장한다면 그 논증은 옳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옳지 않다.

생리학을 공부한 육상 선수만이 잘 달릴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틀린 것처럼 오직 논리학을 공부하는 학생만이 추론을 잘 또는 정확하게 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실수일 것이다. 몸에서 어떤 반응이 진행되는지 알지 못 하는 육상선수도 종종 탁월하게 달릴 수 있다. 논리학을 공부한다고 어떤 사람의 논증이 정확할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것은 아니다. 몇몇 고급반에 속하는 생리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비록 신체가 기능하는 방식에 대해 많이 알고 있더라도 육상 운동장에서 부실하게 달릴 수 있다.

하지만 논리학을 공부한 사람은 훨씬 더 많이 동일한 기본 지성을 지닌, 추론에 연관된 일반적인 규칙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다른 사람들보다 추론을 잘 할 개연성이 높다. 이는 부분적으로 논리학을 배운 학생은 다른 종류의 추론이 올바른지 시험하는 것에 대한 방법을 습득할 테고 실수가 더 쉽게 감지되면 될 수록 그런 주장이 설 자리는 줄어들 것이다. 감지된 실수들에는 흔한 오류 혹은 추론에서의 “자연스런” 실수들이 있을 것이며 이들은 충분히 이해되면 쉽사리 확실하게 피할 수 있는 것들이다.

논리학의 연구는 또 다른 이유로 사람들의 추론의 질을 개선할 개연성이 크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논증의 분석, 논증의 평가, 자신만의 논증을 구성을 실질적으로 행할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추론REASONING은 우리가 이해할 뿐 아니라 행하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논리학을 적절하게 연구하는 것은 그것을 과학으로서 뿐 아니라, 기술은 개발되고 기교는 숙달되어야 할 기법으로도 접근할 것이다. 이러한 목표를 위해 많은 다양하고 풍부한 양의 연습문제를 보게 될 것이며 이들 문제를 통해 그 논리적 기술과 기법은 강화되고 세련되어질 수 있다.

논리학의 방법으로 완전히 분석될 수 있는 인간사의 문제가 있고 심지어 훌륭한 논증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현안들도 있다. 때로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논리적 논증보다 더 설득력이 있으며 어떤 맥락에서는 그것이 더욱 적절할 수도 있다. 의지해야만 하는 판단을 해야한 한다면 장기적으로 가장 견고한 토대임이 증명될 것은 정확한 논증이다.논리학의 방법과 기법을 갖고 우리는 옳은 논증과 그릇된 논증을 효율적으로 구별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과 기법이 이 책의 소재이다.

 

1.2 명제와 문장 PROPOSITIONS AND SENTENCES

모든 논증의 토대가 되는 명제propositions를 고찰하면서 우리는 시작한다. 명제는 주장되거나 부정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명제는 이 점에서 질문, 명령, 감탄과는 구분된다. 물어볼 수 있는 어떤 질문도, 주어질 수 있는 어떤 명령도, 발화될 수 있는 어떤 감탄도 주장되거나 거부될 수는 없다. 오직 명제만이 어떤 것이 그러한 경우(그렇지 않은 경우)라고 주장하며 따라서 참 혹은 거짓일 수 있다.그러나 참과 거짓은 질문, 명령, 감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게다가 모든 명제는 참이거나 거짓이다. 비록 주어진 명제의 참, 거짓을 우리가 알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은하계 내의 어떤 다른 행성에 생명체가 있다는 명제는 그것의 참과 거짓을 우리가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외계 생명체가 있다는 것은 차이거나 참이 아니거나다. 그것이 참이냐 혹은 거짓이냐는 것은 명젱,; 본질적인 특징이다.

주장되는 방법에 따라 명제와 문장을 구분하는 것은 관행적이다. 두 문장은 명백히 두 개의 다른 문장인데 왜냐하면 서로 다른 단어로 구성되어 있고 다르게 배열돼 있으며 같은 맥락에서 ㄱㅌ은 의미를 갖지만 같은 명제를 주장하기 위해 사용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레슬리는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 선거는 레슬리에 의해 이겨졌다.

이 두 문장은 명백히 두 개의 다른 문장이다. 왜냐면 첫 문장은 세 단어로 이루어져 있고 두 번째는 네 단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시작도 다르고 등등의 이유에서다. 그래도 이들 두 선언적인 문장들은 정확히 같은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명제라는 용어를 선언적 문장들이 전형적으로 주장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다.

게다가 문장은 항상 특정 언어 속의 문장이며 그 언어는 그 문장이 사용되는 언어이다. 그러나 명제는 어느 언어에 대해 특정적이진 않다. 다음 네 개의 문장들은

It is raining.

Está lloviendo.

Il pleut.

Es regnet.

확연하게 서로 다르다. 넷 다 다른 언어로 돼 있다.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 하지만 그들은 단 하나의 의미를 가지며 모두 각각이 다른 구성으로 돼 있는 의미의 명제로 발화될 수 있다.

같은 문장이 다른 맥락에서 매우 다른 진술을 하도록 사용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은 다음 문장인

현재 미국의 대통령은 전임 주지사이다.

를 빌 클린턴에 대해 1997년에 (참인) 진술을 발화할 수도 있지만 만약 당신이 그 문장을 1992년에 했다면 당신은 조지 부시에 대해 (거짓인) 진술을 했던 셈일 것이다. 명백히 같은 문장이 다른 시간적인 맥락에서 다른 명제를 주장하기 위해서 혹은 다른 진술을 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 “명제”와 “진술”이란 용어들은 정확히 동의어인 것은 아니지만 논리적인 조사의 맥락에서 그들은 매우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논리학에 대해 어떤 작가들은 “명제”보다는 “진술”을 선호한다. 비록 후자가 논리학의 역사에서는 한층 더 흔하게 쓰여왔지만. 이 책에선 두 용어 모두 사용된다.

지금까지 상술된 명제는 단순한 것이었다. 즉 “다른 행성에 생명체가 있다.” “레슬리가 선거에서 승리했다.” 등등. 그러나 명제는 종종 그 자체에 다른 명제를 포함하고 있는 복합적인 것이기도 하다. 1945년 히틀러의 제3공화국 마지막 날에 대한 설명에서 발췌된 다음 글을 생각해 보라.

 

미국과 러시아인들은 재빠르게 엘베강의 합류점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영국은 함부르크와 브레만의 입구에 있었고 점령된 덴마크로부터 독일을 고립시키기 위해 위협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볼로냐는 함락됐고 알렉산더의 연합군은 포 협곡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4월13일 비엔나를 잡고나서 다뉴브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 단락에 포함된 몇몇 명제들은 다른 명제를 포함하고 있는 복합명제들이다. “영국은 함부르크와 브레멘의 입구에 있었다,”는 예를 들면 두 명제의 연접이다. 즉, “영국군은 함부르크의 입구에 있었다.”와 “영국군은 브레멘의 입구에 있었다.”의 연접이라는 말이며 그 연접 명제는 그 자체로 더 큰 연접의 구성원–즉, “영국군은 함부르크와 브레멘의 입구에 있었고 [영국군은] 독일군을 점령당한 덴마크로부터 단절하기 위한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이다. 이 글에 있는 모든 명제는 참으로 주장되고 진술되었다. 두 명제의 연접을 주장하는 것은 구성 명제 각각을 주장하는 것과 엄밀핟게 동치이다.

그러나 그들 구성원의 참을 조장하지 않는 복합 명제도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대안적인(혹은 이접인)

 

순회법원은 유용하거나 유용하지 않다.

 

명제에서 두 구성원 중 어느 쪽도 주장되지 않는다. 오직 합성인 “이거나-또는”이 주장되고 있을 뿐이다. 만약 이 이접 명제가 참이라 해도 그 구성원 중 하나가 거짓일 수 있다. 그리고 가정적(혹은 조건적) 합성 명제 중 다음과 같은 명제에서

신이 존재하지 않다면 그를 발명할 필요가 있다.

역시 어느 쪽 구성원도 주장되지 않았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주장된 것이 아니다. 역시 “그를 발명할 필요가 있다.”는 명제도 주장되지 않았다. 그저 “만약_그렇다면” 명제가 가정적 또는 조건적 진술에 의해 주장되었을 뿐이며 그 가정적인 진술은 비록 구 구성원 둘 다가 거짓이었더라도 참일 수 있다.

이 책의 강좌에서 우리는 단순한 것과 합성적인 많은 종류의 명제들의 내부 구조를 모두 면밀하게 고찰하고 분석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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